봉준호 감독의 <인플루엔자> 관련 기사

Media ♣/Movie 2004/05/11 00:35

 

처음으로 디지털 카메라를 손에 든 봉준호 감독은 서울특별시경찰청, 서울영상위원회, (주)씨큐리티옵티컬의 도움을 받아 서울 시내 곳곳에 매설된 수많은 감시 카메라와 CCTV를 통해 조혁래라는 인간의 모습만 채집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채집한 척했다는 게 옳다. 봉준호가 만든 페이크 다큐멘터리 <인플루엔자>는 오로지 CCTV의 이미지만으로 어떻게 이야기가 이루어질 수 있으며, 어떻게 충격적이고 서늘한 공포를 선사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영화다. 봉준호는 디지털 영화를 만들면서 실제와 허구가 이상하게 뒤섞여버리는 신기한 체험을 했다. 디지털은 페이크 다큐멘터리와 만나면서 영화의 촬영 방식까지 바꿔놓았다.


조혁래라는 평범한 시민이 폭력적으로 변하는 모습이 굉장히 잔혹하게 보였다.


찍으면서 이게 무서울까, 폭력이 더 심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제작팀도 촬영하면서 폭력에 익숙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보여지는 폭력의 내용 자체나 묘사의 수위가 높진 않다. 피바다가 되거나 신체가 훼손되는 건 아니니까. CCTV의 차가운 느낌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카메라가 개입을 하지 않으면서 싸늘하고도 집요하게 사건을 보여 준다. 그게 더 섬뜩한 느낌을 주는 게 아닌가 싶다.

 

마치 실제 CCTV에서 촬영한 소스를 틀어놓은 것처럼 영화를 구성했다. 촬영할 때 행인들이 실제로 무슨 사건이 터진 줄 알고 소동을 벌였다고 하던데.

 

현금 인출기 부스에서 조혁래가 할머니로부터 돈을 빼앗을 때 바깥에서 고등학생이 아줌마의 핸드백을 빼앗고 도망가는 장면이 있다. 그 고등학생을 보고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길을 막아서는 등 한바탕 싸움이 붙을 뻔했다. '촬영입니다' 그랬더니 '카메라가 어디 있어? 스탭이 어디 있어?' 그러시더라. 카메라는 당연히 CCTV처럼 위에 매달려 있고 스탭도 잘 안 보이니까 실제 상황으로 오인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카메라 안에 자연스럽게 들어오기도 하고.


가장 잔인한 폭력이 등장하는 주차장 신에서는 처음으로 카메라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움직인다.


처음에 시나리오 쓸 때부터 주차장 공간에서 90도 패닝을 하고 싶었다. 실제로 그렇게 움직이는 CCTV가 있기는 하다. 촬영 기사가 엄청난 인내력을 가지고 90도 패닝을 계속했다. 그 무심한 패닝의 느낌이 너무 섬뜩하고 냉혹하게 느껴졌다. 격렬하고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데 CCTV 카메라는 해왔던 동작 그대로 무심하게 돌아간다. 피사체를 전혀 존중해주지 않는 카메라다. 네가 거기서 피를 흘리고 죽든 나는 상관없다는 식으로. 그것이 <인플루엔자>의 핵심적인 비주얼이다.


사건의 중심에 있는 조혁래와 그와 함께 강도 행각을 벌이는 윤제문, 고수희는 전에 단편 <싱크 앤 라이즈 Sink & Rise>와 장편 <플란다스의 개>에서 함께 작업했던 배우들이다.


CCTV 시점이라는 게 결국 풀 쇼트가 많이 나오게 되는데 사람들은 CCTV를 볼 때 표정 연기나 대사를 보는 게 아니라 행동을 보게 된다. 행동과 동작이 잘 단련돼 있어 세밀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배우가 필요했다. 연극 무대 경험이 많은 둘은 이런 무지막지한 폭력을 왠지 대수롭지 않게 스윽 해버릴 것 같은 분위기와 인상이라고 늘 생각해왔다. 가장 자연스러운 연기를 위해 그들에게 연기하지 말고 행동해 달라고 주문했다. 일종의 선언이었다.


일반인들이 프레임 안에 들어오면서 실제와 허구가 모호해져 버렸다.


일반인들이 프레임에 들어오는 건 이 영화의 컨셉으로 봤을 때 성공적인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고도의 조작인 것 같기도 하다. 계속 드는 생각이 우리가 흔히 리얼하다고 부르는 게 뭔가. 예를 들어 어떤 동작을 하면 사람들이 리얼하다고 느끼니까 그 동작이 하나의 테크닉이나 장르로 발전한 게 아닌가 싶다. 내가 통제하지 않은 그 많은 사람의 행동은 흉내 내서는 결코 같을 수 없는 무엇일까. 찍으면서 계속 의문이 들었다. 아직 답을 얻지는 못했다. 영화 작업 안에서 다큐와 픽션이 오고 가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영화를 공부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디지털 작업을 해보니 어떤가?


디지털은 리와인드 해서 지우고 다시 찍어도 되니까 예산에서의 부담이 줄었다. 촬영 전 많은 것을 준비해야 하는 영화에서도 즉흥 연출이 가능할까 싶었는데 이번에 시도해봤다. 예를 들면 초반에 조혁래가 아줌마 돈을 어설프게 훔치고 난 후 바닥에 떨어진 돈을 줍는 사람이 우리 조감독이다. 원래 계획에 없었던 건데 의도하지 않게 몸싸움하다가 돈이 떨어졌고 그래서 조감독에게 주워 보라고 했다. 이런 거 찍을 때나 해보지 언제 해보겠나 싶었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인플루엔자>를 본 사람들이 이제 현금 인출기에 돈 뽑으러 못 가겠다고 하더라. 백주 대낮, 가장 일상적인 공간에서 끔찍한 폭력이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다.


나도 지난번에 지하 주차장에서 주차하고 가는데 약간 섬뜩하더라. 내가 찍어놓고도 괜히.(웃음)

 

사진 맹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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